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진행 == 1968년 11월 2일 밤 북한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하였다. 이때 울진·삼척 지구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각 30명씩 특수정을 이용, 해안에 상륙했다.[[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50618.010020723260001|침투지점]][* MBC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진짜 사나이]] [[제50보병사단]] 해룡연대 편에서도 이 지점이 장면으로 나왔다. 해룡연대 담당 구역이며 이 지역은 [[제2작전사령부]]의 최전방과도 같은 곳이다.] 이 무장 유격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같은 해 1월 21일 청와대를 기습 동시에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하기 위해 남파되었던 무장공비들과 같은 부대] 소속이었다. 이들은 1968.10.30~11.2 사흘 동안 120명의 북한 유격대는 8개조로 나눈 후, 야음을 틈타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고포 해안에 상륙하여 [[울진군]]·[[삼척시|삼척군]]·[[봉화군]]·[[강릉시|명주군]]·[[정선군]] 등지로 침투하였다. 이들이 상륙한 곳에 있던 해안초소 근무인원은 총 6명이었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발견 차단하거나 상부로 보고해야 할 해안 초소 분대장은 [[직무유기|말년병장의 전역을 축하한다면서 4명이 술집으로 가버렸고, 남은 인원 2명이 보초를 섰어야 했으나, 일병 한 명은 2~3달 고참이란 핑계로 내무실에서 자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이었던 문무림 일병은 그들이 상륙하는 걸 발견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해버렸다.]] 그 후 문 일병은 분대장에게 보고를 했으나 횡설수설했고, 그들은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어서 박격포 몇 발을 바다쪽으로 발사한 후, 상륙하려던 적을 격퇴했다고 허위보고했다. 첫 보도된 사례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고, 남로당 가입서를 작성하며, 도망치려던 주민을 살해하였다.[* 죽음 무릅쓰고 릴레이식 申告(신고), 1968-11-06, 경향신문] 폭발물을 가지고 있어 산업시설 파괴의 목적도 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休日(휴일)의 挑発(도발) 북괴 침투의 真相(진상), 1968-11-06, 경향신문] 그들은 남한측의 [[군복]]·신사복·노동복 혹은 일반 와이셔츠나 면 바지 같은 평상복 등 갖가지 옷차림으로 위장하였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이후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 책자와 전단을 나누어 주면서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인민유격대 및 [[조선로동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입당원서를 나눠주고 반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또한 그들은 주민들이 겁에 질려 머뭇거리며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위협하기 위해서 '''전혀 무장하지 못하고 대항력도 지니지 못한 민간인을 향하여''' [[학살|대검으로 찌르거나 심지어는 늦게 도착한 주민을 돌로 머리를 쳐 무참히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민간인을 함부로 대하는 북한군의 이러한 행위는 게릴라 전술 중 하나인 게릴라 양성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할 수준이다.[* 미국의 특수부대이자 게릴라 육성을 주 목적으로 하는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도 적지에 침투해 게릴라 양성시 다짜고짜 총을 들이밀며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현지언어로 대화를 구사 및 적성국 문화를 최대한 반영한 복장은 물론이고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무전문 부사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민심을 얻고 얻은 민심으로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부추기는데 치중한다. 미국보다 민사작전율이 낮은 이스라엘조차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전기, 식량, 물을 제공할땐 거리두고 제공하는것도 하마스 때문이고 폭격할땐 루프노킹을 활용하였다.][* 게릴라 공산혁명의 얼마 안 되는 성공사례인 [[쿠바 혁명]]을 봐도 군사작전 대신 일단 [[의사]] 출신인 [[체 게바라]]의 의료지원 등으로 현지 주민들을 도와주며 인간적 유대관계를 쌓는 작업을 했고 이들이 도움을 줘서 결국 이겼다. 반면 북한은 일단 언어적으로는 그래도 통하는 상태였지만 남한 사람들의 민심을 포섭할 생각보다 총을 들이대서 "안 따르면 죽인다" 라고 협박하는 방식은 적지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위다. 저런 방식으로 민간인을 대하면 민간인들은 당연히 정부에 고발할 것이고, 군대를 상대하게 되면 특수부대가 아닌 일개 병사로 전락되며 개개인이 아무리 뛰어나건간에 게릴라는 그대로 끝장이기 때문.] 이때 인근 [[태백시|장성읍]]에 거주하던 전병두 씨가 마을을 방문했다가 대검에 찔려 죽었다.[*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예비역]]이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한다.] 삼척군 하장면의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족 일원 중 세 사람이 난자당해 살해당했다. 또 무장공비들은 추수를 하던 주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망자와 부상자를 일으키는 한편 주민들에게 불온 책자와 위조지폐를 나눠주고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하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편지나 소포들을 배달하던 [[집배원]]을 납치해 살해하고 약탈한 우편물을 모두 불태운건 덤.[* 이른바 '통신 차단'이라는 이유였는데, 당시에는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우체국 업무를 마비시키는 것만으로도 통신에 지장을 초래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13년 후 발생한 [[우순경 사건]]에서도 범인인 [[우범곤]]은 사건 초기에 우체국을 습격하여 신고가 지연되어서 희생자 수를 늘릴 수 있었다. 다만 집배원 유니폼을 경찰관 제복으로 오해해서 죽였다는 진술도 있다.] 공비들에 의한 약탈사건도 보고되었는데, 경북 [[영주시|영주군]]에서는 일가족을 안방에 묶어놓고 외양간의 소[* 농기계가 보급된 지금과는 달리 그때까지만 해도 소는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재산목록 1호였다. 농기계를 이용한 기계화농법은 2년 후인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보급되었고 80년대 초가 되어서야 정착되었다.]를 끌고 가고 장롱 안에 있던 옷들을 빼앗아 달아나는 한편, 강원도 [[평창군|평창]]에서는 가장을 제외한 일가족을 대검과 돌멩이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소와 닭을 빼앗았으며 절간을 습격해 승려들을 감금하고 시주받은 현금과 식량을 약탈해 달아나기도 했다. 이때 연고없이 절에서 지내면서 스님들의 식사를 지어주는 노인을 단검으로 살해했으며 등산객을 인질로 납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연락이 제한된 상황에서 릴레이 방식으로 연락을 취하여 군 당국에 신고하게 되고, 11월 4일 14시 30분, 상황을 보고받은 대간첩대책본부는 강원 정선·영월·삼척 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 예비군은 동부 산악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나쁜 기상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 강력한 화력을 이용하여 전면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다. 당시의 11월 16일까지 벌어진 소탕작전에 의하여 북측 무장공비 31명이 사살당하였고, 2명이 생포되었으며, 적의 장비 중 [[PPS-43]] 기관단총 3정, 권총 1정, 실탄 다수, TNT 3개, 수류탄 20발, 비상식량 200개, 카메라 1대를 노획하였다. 또한 68년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